프랑스 하원, 드레퓌스 준장 승격 만장일치 가결 - 130년 만의 명예 회복 L’Assemblée nationale vote à l’unanimité l’élévation d’Alfred Dreyfus au grade de « général de brigade » Restauration de l'honneur après 130 ans
프랑스 하원, 드레퓌스 준장 승격 만장일치 가결
130년 만의 명예 회복, 반유대주의 경계 메시지
한불통신 파리, 프랑스) – 프랑스 하원이 지난 6월 2일(현지시간) 19세기 말 독일 스파이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투옥되었던 유대계 장교 알프레드 드레퓌스(Alfred Dreyfus)를 준장 계급으로 승격하는 법안을 만장일치(197명 투표 참여)로 가결했다.
이번 결정은 약 130년 만에 이루어진 드레퓌스 명예 회복의 중요한 이정표이자, 프랑스 사회에 만연했던 반유대주의에 대한 경계심을 다시금 일깨우는 강력한 메시지로 평가된다.
이 법안은 집권 여당인 르네상스 당의 가브리엘 아탈 전 총리가 발의했다.
아탈 전 총리는 법안 제안 이유에서 "알프레드 드레퓌스를 덮친 반유대주의는 과거의 일이 아니다"라며 "공화국은 모든 형태의 차별에 맞서 경계심을 유지하고 단호함을 보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법안은 추후 상원 심사를 거쳐 최종 확정될 예정이다.
드레퓌스 사건: 프랑스 사회를 뒤흔든 반유대주의의 그림자
알프레드 드레퓌스 사건은 1894년 당시 프랑스 육군 포병대위였던 그가 독일 스파이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받고 '악마의 섬'에 유배되면서 시작되었다. 이는 당시 프랑스 사회에 팽배했던 반유대주의적 분위기에 기반한 명백한 오판이었다.
이후 참모본부 정보국장이었던 조르주 피카르 중령의 진실 규명 노력으로 사건의 전말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두 차례의 재심을 거쳐 드레퓌스는 1906년 무죄를 선고받고 복권되었으며, 소령으로 진급하고 최고 영예인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받았다. 그러나 유배 생활로 인해 건강이 악화되어 이듬해 전역했다.
드레퓌스 사건은 당시 프랑스 사회를 드레퓌스파(진보, 공화, 지식인)와 반드레퓌스파(보수, 군부, 가톨릭 보수파)로 양분시키며 극심한 갈등을 야기했다.
특히 이 사건은 프랑스 사회에 만연했던 반유대주의의 심각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냈으며, 이는 오늘날까지도 중요한 역사적 교훈으로 남아있습니다.
언론의 역할과 '나는 고발한다': 비판적 저널리즘의 탄생
드레퓌스 사건은 프랑스 언론의 역사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사건 초기, 많은 언론은 군부와 보수 세력의 주장을 그대로 전달하며 드레퓌스의 유죄를 확신하는 분위기를 조성했다. 반유대주의 성향의 언론들은 노골적으로 드레퓌스를 비난하며 대중의 편견을 부추겼다.
그러나 1898년, 세계적인 소설가 에밀 졸라가 일간지 '로로르(L'Aurore)'에 ''나는 고발한다(J'accuse...!)''라는 제목의 공개서한을 발표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졸라는 이 기고문에서 드레퓌스의 무죄를 주장하고 군부와 사법부의 부패를 고발하며 진실 규명을 촉구했다.
이 서한은 엄청난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고, 드레퓌스 재심 여론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졸라는 이로 인해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되기도 했지만, 그의 용기 있는 행동은 지식인이 사회 불의에 맞서 목소리를 내는 '참여적 지식인'의 전형을 제시했다.
드레퓌스 사건을 계기로 프랑스 언론은 단순한 정보 전달자를 넘어 사회적 정의를 옹호하고 권력을 비판하는 비판적 저널리즘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언론의 자유와 책임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졌고, 이는 프랑스 언론의 발전과 성숙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이번 드레퓌스 준장 승격 결정은 단순히 한 개인의 명예를 회복하는 것을 넘어, 과거의 잘못을 직시하고 미래 사회에서 모든 형태의 차별에 맞서 싸우겠다는 프랑스 공화국의 강력한 의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paris50kyo@gmail.com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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