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 '신사실파' 생존작가 백영수 화백

 

<사람들> '신사실파' 생존작가 백영수 화백

<사람들> '신사실파' 생존작가 백영수 화백

서울아트센터 공평갤러리에서 12년만에 개인전

한불통신-ACPP) 이제 나이가 들어 오래 이야기하기 어렵다던 여든여덟 살의 노(老) 화가는 1940년대 함께 활동했던 '신사실파' 동인의 이름이 나오자 힘든 내색 하나 없이 끝없이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김환기와 장욱진, 이중섭, 이규상, 유영국 등 1940년대 '신사실파' 동인으로 활동했던 백영수 화백이 공평동 서울아트센터 공평갤러리에서 오랜만에 개인전을 열고 있다.

 

'신사실파'는 순수 조형미술을 하겠다며 1947년 만들어진 미술가 모임으로, 백 화백은 당시 모임의 막내였으며 이제는 유일한 생존작가로 남았다.

"미술사적으로 말하자면 당시 한국 미술은 해방 이후 서양화를 수입한 것이었어요. 메이지 시대 일본 사람들이 파리에서 공부하고 동경미술학교를 만들었어요. 그리고 그림 배우러 동경미술학교에 간 한국 사람들이 파리에서 배우는 모양새로 도쿄에서 공부하는 거에요. 고희동이나 도상봉이 그랬죠. 당시 서양화는 인상파나 후기 인상파 화풍이 전부였고 한국 미술도 다 인상파, 그러니까 선이 굵고 넓게 칠하는 게 대부분이었어요. 그때는 그런 그림을 보고 사실적인 그림이라고 했죠. 그래서 우리가 새로운 사실을 해보자 해서 '신사실'이라는 이름을 붙인 거에요."

 

신사실파 동인은 6.25전쟁 이전 두차례 서울에서 전시회를 열었고 이후 부산으로 옮겨가 또 한 번 전시를 했다. 이중섭이 신사실파 동인에 합류한 것도 부산에서였다.

신사실파 동인들은 네 번째 전시를 준비했다. 이번에는 윤효중의 조각 작품도 넣는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포함하려고 했지만 김환기가 파리로 떠나는 바람에 신사실파 전시는 이뤄지지 못했다.

이후 우여곡절 끝에 1979년 파리로 건너가 30년 넘게 파리에서 생활했던 백 화백은 그동안 수많은 생사의 갈림길에 섰다. 1989년에는 대형 교통사고로 간이 파열되는 바람에 한동안 유화에 쓰이는 테레빈유 냄새를 맡지 못해 소품밖에 그릴 수가 없었다. 어느 정도 건강이 회복되는가 싶더니 1994년에는 위암 수술을 받아 다시 한동안 요양을 해야 했다.

12년 만에 한국에서 전시회를 하는 것도 이런 사정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회고전이라고 하기는 그렇고, 하도 오랫동안 침묵해서 한자리에서 그동안의 작품을 보여 드리는 자리로 마련한 전시예요. 이제 신작으로만 전시하기는 어려워서 1970년대부터 최근까지 작품 중에서 고르고 1960년대 작품도 일부 넣었어요."

소박하고 따뜻한 그의 그림에는 까까머리 소년과 어머니, 나무, 새, 초가, 꽃, 달, 강아지 등이 단골 소재로 등장한다. 특히 고개를 거의 180도로 갸우뚱하게 그린 얼굴은 백영수 화백의 그림임을 알리는 '트레이드마크'다.

 

"6·25 동란 중 낙동강 하류 지역에 피난을 갔어요. 거기 있던 초가에서 6~7살 정도 되는 아이를 봤어요. 지쳐 있는지, 기대있는지, 아니면 누구를 기다리는지 모르겠는데 어쨌든 그 장면이 너무 인상적인 거에요. 그 뒤로 인물을 그리면 정자세가 아니라 자꾸 갸우뚱하게 그리는 거에요. 처음엔 생각하고 꿈꾸는 것이라고 그렸는데, 그러다 보니 너무 기울어져서 요즘은 좀 (얼굴을) 세워 그리려고 해요."

소품을 포함해 130여 점이 걸린 이번 전시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을 묻자 작가는 의외로 선뜻 작품 한 점을 골랐다.

프랑스 서민들이 피우는 골로와즈 담배 한 개비를 손에 쥐고 다른 한 손에는 붓을 든 화가 뒤로 아내와 딸의 모습이 보이는 소박한 그림을 지목하며 백 화백은 말했다.

"1984년 파리에서 조그마한 아파트를 장만했을 때 그린 그림이에요. 우리 가족을 그린 그림이 제일 마음에 들어요." (서울=연합뉴스) 황희경 기자 = zitron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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